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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 명품배우 세종 한석규 옥에 티 - 안경자국

한솔골프 작성함 2011. 10. 28. 14:21


글을 쓰다 우연히 찾은 안경자국...뿌리깊은 나무 세종은 안경을 안쓰고 나오던데.....
안경을 착용하는 많은 분들은 한석규씨의 코에 있는 자국이 무엇인지 아실껍니다.(ㅎㅎ)
나무랄데 없는 명품 연기를 보여주시는 배우 한석규씨..흠잡을데가 없죠..
한번 웃고자 올려봅니다. 안경의 역사도 한번 읽어주세요.^^

세종대왕이 있던 시기에 안경을 착용하였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안경의 역사와 세종이 살아있을 시기와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100년 200년 차이는 충분히 오차 범위에 들어갈수 있다고 보여진다.

성군’ 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의 안경사

朝鮮時代(조선시대)에는 안경을 애체라고 하였다. 이 애체라는 말은 중국어표기에서 그대로 따온 것인데, 학자들은 이 용어로써 안경의 출처를 밝히고자 애썼다. 특히 李明變(이명변) 은 네덜란드 상인 이름의 중국어 音譯(음역)이라 주장, 극동의 안경 전파자를 네덜란드인으로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애체가 안경의 용어로 쓰이게 된 원인은 확실하게규명되지 않는다. 애체가 어떠한 경로로 쓰이게 되었건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치 않다. 다만 애체라는 말이 李德愁(이덕수)의 '靑莊館全書(청장관전서)'에 안경을 지칭하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저서를 통해 안경의 보편적인 사용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따름이다. 왼쪽의 사진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중국의 귀갑 안경테(19세기)이며, 오른쪽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었던 안경과 안경테. 우리나라에는 안경이 16세기 말에 전해진것으로 보인다.그러한 추측을 가능케 한 자료는 '之峰類說(지봉유설)'과 '正祖實錄(정조실록)'이다. 정조는 '안경은 200년 전에 처음 있은 물건이다'라고 하여 '之峰類說(지봉유설)'의 기록을 뒷받침 하였다.

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의 안경..

조선 선조 때 문신 학봉 김성일 (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안경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학봉 김성일의 안경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 안경역사의 시작을 임진왜란 전으로 끌어올린 안경이며, 안경의 형태, 코 모양은 조선 특유의 투박함과 섬세함은 물론 강약의 적절한 조화로움과 안경집의 처리법이 우리나라 전통 공예품과 같아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특징은 대모(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어 졌으며, 귀에 거는 끈이 원래는 쪽빛실이었으나 끈이 떨어져 밤색 헝겊 을 박아 달아놓았다. 또 코의 경첩은 놋쇠로 만들어 뒷면에 부착하고 앞판 장식이나 못은 구리로, 부러진 안쪽 안경 귀는 놋쇠로 보수되어 있다. 현재 14대 후손으로 의성 김씨의 종손 김시우(金時禹)님이 소장하고 있다.

한국사 (史) 안의 안경

黃株錫(황주석)의 '臣齊全書'(신제전서)에 기록된 '東京水晶眼鏡銘(동경수정안경명)'을 상고하면 임진왜란 직후에 국내 에서 안경이 제작되고 있었음이 증명된다.즉 慶州府尹 閔機(경주부윤 민기)가 1630년경에 경주에서 만들어진 南石眼鏡(남석안경)을 착용했다는 것이다.'臣齊全書'(신제전서)는 金誠一(김성일) 의 안경과 함께 우리나라의 안경 기원 시기를 소급해 잡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사진의 안경은 18세기의 慶州南石眼鏡(경주남석안경)과 牛角(우각)테.

1880년경의 牛角(우각) 안경테. 牛角(우각) 안경테의 제작에는 암소뿔이 주로 사용되는데 뿔 하나로는 보통 한장의 테를 만들수 있다. 뿔을 오랫동안 물에 담궈 편 후에 황줄이라는 기구를 사용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평평해진 표면위에 안경본을 얹어 오려내고 활비비,실톱,끌,칼 등의 도구로 안경테를 만든다. 형이 완성된 것은 보드라운 페이퍼로 문지르고 숫돌가루나 재를 물에 축여 발라서 광을 냈다.

南石眼鏡(남석안경)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미국인 선교사 제이스 게일이 '코리언 스케치'에 수록한 일화에 의하면 南石眼鏡(남석안경)은 미국돈으로 15달러나 주어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일은 또 이같은 거금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양반들은 이를 구입 못해 안달이었다고 기록하면서 동양인들의 허세에 찬 불합리한 생활태도를 꼬집었다. 그런데 안경의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南石眼鏡(남석안경)이 대량 생산되자 가격도 하락했는데, 1930년대 매우 번창했던 慶州 保眼堂(경주 보안당)의경우 1939년도에 최고 80원에서 최저 2원짜리까지 다양한 제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위쪽 좌측 사진은 20세기초의 南石眼鏡(남석안경). 위쪽 우측는 1850년대의 제품으로 여성용이다. 렌즈는 面取(면취).

우리 나라의 안경업계는 많은 부분이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 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들은 宮川太吉(궁천대길)의 大學堂(대학당)을 시작으로 충무로 일대에 업소를 속속 열었고 막대한 자본으로 국내 시장을 완전 장악 했다. 일본인들이 점유한 업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략 세가지 경로를 통해 발을 디뎠다. 첫째는 독자적으로 개업한 경우이며, 둘째는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 진출한 경우이다. 마지막으로 일인의 업소에 취업한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이 세 번째 경로를 통한 진출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업계 독점은 제품의 공급에서도 나타났다. 모든 제품이 일본에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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